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3세 (문단 편집) == 찬탈 ==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는 [[낚시]] 여행을 떠났다가 [[뇌졸중]]으로 40살에 급사하고 말았다. 에드워드 4세는 원래 즉위 전부터 여색을 극도로 밝혔는데 나이가 들고서도 거듭된 폭식과 폭음으로 [[건강]]이 망가졌는데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4세는 유언장에서 동생들 중 생존해있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섭정]]으로 지명해놨기에, 리처드가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되어 새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정권을 잡아야했다. 하지만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유언은 물론 국왕의 [[죽음]]조차(!) 리처드에게 알리지 않고 동생 리버스 백작 앤서니에게 무장한 군사 2천명을 주어 장남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교육을 위해 웨일스 변경에 있던 아들을 [[런던]]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에드워드 5세가 어려도 일단 [[대관식]]을 치르면 굳이 섭정이 필요하지 않으니 리처드를 이후의 정국에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도였겠지만, 알려지지 않은 경로로 이 소식을 접한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의 측근 [[윌리엄 헤이스팅스]]가 관여했다는 설이 있다.] 버킹엄 공작을 비롯한 [[신사]] 6백 명과 함께 약간의 호위병력만 대동하고 내려가 [[런던]] 근교에서 무장한 앤서니의 군대와 마주쳤다. 리버스 백작 앤서니와 만난 리처드는 앤서니는 물론 그 동료 토머스 본,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사망한 첫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한 뒤 어린 왕의 신변을 확보한다. 당시 잉글랜드에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인]] 연대기 작가 도미니크 만치니는 리처드의 리버스 체포가 당시 강력한 대귀족 중 하나이며 왕국 자문회의 수장인 [[윌리엄 헤이스팅스]] 경의 조언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적었다. 이후 리처드는 에드워드 5세에게 리버스 백작을 [[반역죄]]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새 왕은 그의 주장을 믿지 않고 처형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쨌든 에드워드 5세와 함께 [[런던]]에 입성한 리처드는 섭정([[호국경]])이 되었고 새 왕의 대관식을 7주 뒤로 미룬 뒤 그를 [[런던탑]]에 모셨는데 말이 좋아 모신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연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처드 입장에서는 조카가 자신보다 외가인 우드빌 가문과 그 수장인 리버스 백작을 더 의지하는 상황에서 대관식을 치르며 권력을 내려놓는 건 불가능했고 자신이 권력을 잡은 상황에서 자신의 적인 우드빌 가문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후 리처드는 왕국의 자문회를 움직여 우드빌 가문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자문회 일원들은 그의 의도를 의심하고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비록 [[부정부패]] 등으로 별로 인기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리버스 백작은 엄연히 왕국의 귀족이었고, 명확한 증거도 없이 그를 반역자로 몰아 체포하고 죽이려는 리처드의 시도는 다른 귀족들에게 불법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초조해진 리처드는 헤이스팅스 경이 은밀히 자신의 반대파와 손을 잡고 있다고 의심했고, 버킹엄 공작과 짜고 기습적으로 헤이스팅스를 체포한 뒤 반역죄를 주장하며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초강수를 두고 만다. 이 때부터 리처드가 찬탈을 생각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헤이스팅스에게 누명을 씌워 숙청한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리처드의 이러한 행위는 순식간에 자문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고갔다. 헤이스팅스의 갑작스러운 처형과 더불어 리처드의 영지였던 북부 잉글랜드에서 2만이나 되는 군대가 그를 지지하기 위해 내려온다는 소식에 자문회 귀족들은 겁에 질려 그의 거수기로 전락했다. 공포를 통해 자문회를 휘어잡은 리처드는 또다시 대관식을 미루고 대관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로 왕의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를 왕과 함께 런던탑으로 옮겼다.[* 리처드가 호국경으로 취임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이미 런던탑에 연금된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을 데리고,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으로 피난했는데 당시 [[수도원]]은 성스러운 피난처로 여겨져 안에 있는 사람을 마음대로 체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왕비를 설득(겸 협박)하기 위해 켄터베리 대주교를 보내서 결국 요크 공작을 런던탑에 함께 연금하고 만다.] 동시에 그의 숙적이던 리버스 백작과 그 추종자들을 마침내 처형하는 데 성공한다. 우드빌 일가의 세력을 꺾은 뒤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너 버틀러라는 숙녀와 먼저 결혼한 상태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선왕과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중혼]]이니 무효이고 그들의 자식들도 [[사생아]]라고 선포한 리처드는 자신이 에드워드 4세의 적법한 계승자라고 선언하면서 리처드 3세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4세의 중혼 여부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생전에 놀아제낀 행각이며 처음 만난 과부와 바로 결혼해버렸던 전적 등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인이라고(...) 여겨졌지만 리처드가 이를 이용해 사기친 것인지 실제로 형이 중혼했다고 믿은 건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을 옹립한 네빌 일가를 견제하기 위해 처가인 우드빌 가문의 형제들을 중용하면서 [[평민]] 출신이었던 우드빌 가문은 하루아침에 [[외척]]으로 크게 출세한다. 하지만 우드빌 가문은 왕비부터가 솔선수범하는 부정부패 등으로 워낙에 악평이 거셌기에 에드워드 4세 사후 그들을 내쫓는 건 큰 무리가 없었다.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재산과 미모에 반해(?) 덜컥 결혼하고는 수많은 애첩들을 후렸고, 이런 호색한 에드워드 4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아내나 딸들을 상납(?)하는 경우도 잦았다. 특히나 우드빌 가문은 왕비 엘리자베스의 빽을 믿고 수많은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에드워드 4세도 [[런던]]시티의 상인들에게 독점권과 이권을 퍼주는 대가로 미녀들을 상납받아 후리는 등, 부부와 처가가 합심한 진상 짓으로 악명 높았다.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 때 [[추밀원]]과 잉글랜드 [[주교]]단은 모두 예비 왕비의 낮은 혈통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국왕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적법한 결혼이라 승인했고, 두 사람의 장남 [[에드워드 5세]]가 12살이 될 때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에드워드 4세가 죽고 나서 사생아 타령을 하는 걸 보면 어찌됐거나 정치적 이유라는 게 설득력이 있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된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의 음탕한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꾼을 고용하여 6명의 사생아를 둔 것을 런던 도처에 선전했고, 윤리와 도덕을 드높이고자(?) 에드워드 4세의 애첩과 애첩을 상납한 남편을 처형했고(애첩을 벌하긴 했으나 목숨은 붙여줬다는 버전도 있다) 에드워드 5세가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썰을 열심히 퍼뜨렸다. 실제로 에드워드 4세는 호색한에다 죽기 직전까지 평민 유부녀와 놀아났고, 6명의 사생아를 두기도 했기에 사생아설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